이황 (1497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황은 조선 연산군과 폐비 신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1498년에 태어났다. 세자 시절 성품이 차분하고 총명하여 왕의 자질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다. 정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세자가 되었고, 1506년 창녕대군, 양평군, 이돈수 등과 함께 사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폐위된 세자 - 장조 (조선)
장조는 조선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왕세자로, 영조와의 불화와 정신 질환으로 뒤주에 갇혀 사망 후 장헌세자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시기 장조로 다시 추존된 비극적인 인물이다. - 조선 연산군의 자녀 - 창녕대군
창녕대군은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차남으로, 중종반정 이후 형, 이복형, 이복 동생과 함께 사사된 성종의 손자이자 중종의 조카이며 단경왕후와 외사촌 관계인 인물이다. - 조선 연산군의 자녀 - 휘신공주
휘신공주는 조선 연산군의 장녀로, 폐위된 후 폐서인되었으며 구문경에게 시집갔으나 중종반정 이후 이혼했다가 재결합했고, 영응대군과 임영대군의 후손이며 아들을 두었으나 후손이 단절되어 이안눌이 제사를 받들었다. - 1497년 출생 - 아타우알파
아타우알파는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스페인 군대에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잉카 제국의 멸망을 가져왔고, 오늘날 안데스 지역에서는 저항의 상징 또는 왕위를 찬탈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1497년 출생 - 한스 홀바인
한스 홀바인은 독일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 바젤과 런던에서 활동하며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 헨리 8세 등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튜더 시대 역사적 기록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황 (149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폐세자 이황 |
작위 | 조선의 왕세자 |
출생명 | 이황 |
금돌이 | 금돌이 |
왕위 계승 | |
재위 | 1502년 9월 15일 – 1506년 9월 2일 |
전임 | 왕세자 이융 |
후임 | 왕세자 이호 |
즉위식 | 1502년 9월 15일 |
배우자 | |
배우자 | 창원 황씨 왕세자빈 |
자녀 | 없음 |
가문 | |
왕가 | 이씨 |
아버지 | 연산군 |
어머니 | 거창 신씨 폐비 신씨 |
출생일 | 1498년 1월 10일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506년 9월 24일 (8세) |
사망지 | 조선 |
묻힌 곳 | 알 수 없음 |
2. 생애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세자가 되었다.[6] 성품이 차분하고 총명하여 왕의 자질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함께 폐세자(廢世子)로 강등되었고 곧이어 사사되었다.[7]
2. 1. 출생과 세자 시절
조선 제10대 임금인 연산군과 폐비 신씨 사이의 장남으로, 1498년 1월 10일(음력 1497년 12월 18일)에 태어났다.[6] 성품은 차분하고 굳세며 엄숙했다고 전해진다. 세자 시절에는 할아버지인 성종과 기상이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총명하여 왕의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정세명(丁世明)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할 예정이었으나, 정식으로 길례를 치르기 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혼사가 무산되었다. 이후 정세명의 딸은 강희신(姜熙臣)에게 시집갔다.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함께 폐세자(廢世子)로 강등되었다. 결국 1506년 10월 10일(음력 9월 24일)에 동생인 창녕대군 성, 양평군 인, 이돈수 등과 함께 사사되었다.[7]
2. 2. 중종반정과 폐위
연산군과 중전 신씨 사이의 장남으로 1498년 1월 10일(음력 12월 18일) 태어났다.[6] 성품이 차분하고 굳세며 엄숙했고, 세자 시절에는 기상이 성종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명하여 왕의 자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정세명(丁世明)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할 예정이었으나, 길례를 치르기 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정식 세자빈이 되지 못했다. 이후 정세명의 딸은 강희신(姜熙臣)에게 시집갔다.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이황 역시 폐세자(廢世子)로 강등되었다. 결국 1506년 10월 10일(음력 9월 24일), 창녕대군 성, 양평군 인, 이돈수 등과 함께 사사되었다.[7]